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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목
  • 관포지교
  • 작성자
  • Excel2002
  • 조회수:993  작성일:19-11-11 14:48:29 (220.122.*.*)
  • 제(齊)나라는 본래 주(周)나라 창건의 일등 공신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이 봉해진 나라로, 그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 왔다. 희공(僖公, 재위 BC731∼BC698)은 태공망 여상으로부터 13대째인데, 그에게는 제아(諸兒), 규(糾), 소백(小白) 등 세 아들이 있었다. 태자인 큰아들 제아가 왕위 계승자였다. 그런데 제아는 자기 친누이인 문강(文姜)과 근친상간하고 있었고, 이 사실을 우연한 기회에 소백이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소백은 패륜적인 형 제아를 제거하고 자기가 왕위를 차지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이 즈음 둘째 아들인 규의 스승이 은퇴하자 포숙이 규에게 관중을 추천했고, 관중은 규를 섬기게 되었다. 이로써 관중과 포숙은 각각 규와 소백을 섬기게 되었다.

    BC697년, 희공이 죽고 제아가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이 사람이 바로 양공(襄公, 재위 BC698∼BC686)이다. 양공 즉위 4년에 노(魯)나라로 시집갔던 문강이 남편과 함께 제나라로 근친(覲親)을 왔다. 15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은 다시 사련을 불태웠다. 그런데 문강의 남편이 이를 눈치 채고 뒷조사를 하여 그들의 불륜 관계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문강의 남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문강을 죽이려고 했다. 문강은 오빠에게 달려가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양공은 완력이 뛰어난 그의 아들 팽생(彭生)을 시켜 문강의 남편을 죽이도록 했다. 팽생은 문강의 남편을 끌어안는 척하면서 늑골을 부러뜨려 죽이고, 노나라 사람들에게는 급질로 죽었다고 통보했다. 하지만 노나라에서는 주군의 사인이 늑골 골절에 있음을 확인했고, 범인 팽생의 처벌을 요구해 왔다. 양공은 팽생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죽여 버리고 말았다.

    양공은 누이동생 문강을 제나라에 머물게 하고 불륜을 계속했다. 사생활이 문란해지니 정치도 그에 따라 문란해졌다. 왕은 포악무도했으며, 법령이 제대로 서지 않고 간사한 무리가 판을 쳤다. 이렇게 되자 공자 규와 소백도 자신들의 안전을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규는 관중과 함께 노나라로 피했고, 소백은 포숙과 더불어 거(莒)나라로 망명했다.

    양공을 원망하는 신하들이 자꾸 늘어났다. 그중에서도 양공을 가장 원망한 사람은 양공의 사촌 동생 무지(無知)였다. 희공이 살아 있을 때 희공은 동생 이중년(夷中年)을 아주 아꼈는데, 이중년이 일찍 죽자 그의 아들 무지를 태자와 똑같이 대우하라는 명령을 내렸었다. 물론 규와 소백은 아버지의 이런 처사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었다. 그런데 제아가 즉위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사촌 동생 무지에 대한 대우를 폐지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무지는 사촌 형 양공에 대해 매우 깊은 원한을 가지게 되었다. 무지는 비밀리에 불평분자들을 모았다. 마침 교체를 해 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계획하던 국경 수비대장들이 양공의 정치가 날로 포악해지자 급기야는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무지를 앞세워 궁중에 침입하여 다락방 속에 숨어있는 양공을 찾아내어 죽여 버렸다. 생각지도 않게 무지가 제나라의 왕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나라를 경영할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역시 양공처럼 포악무도하게 정치를 하다가 많은 사람에게 원한을 샀고 왕이 된 지 수개월 만에 살해되고 말았다. 이것이 BC685년의 일이다.

    제나라에는 권력의 공백 상태가 찾아왔다. 이로부터 제나라 주인의 자리를 놓고 규와 소백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이 시작되었다. 노나라에 있던 규는 관중을 군사(軍師)로 삼아 귀국을 서둘렀고, 거나라에 있던 소백은 포숙을 군사로 삼아 귀국을 서둘렀다. 소백이 망명해 있던 거나라는 제나라의 국경에서 가까운 곳이었으므로 규보다 소백이 먼저 제나라에 당도하리라는 것을 계산에 넣고 있었던 관중은 별동대를 이끌고 소백이 귀국하는 길목에 미리 가 매복을 했다. 소백이 눈에 들어오자 관중은 활시위를 당겼고, 시위를 떠난 화살은 소백의 배에 명중했다. 소백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관중은 이 사실을 노나라에 있는 규에게 보고했고, 규는 제나라의 주인이 다 된 기분으로 느긋하게 귀국했다.

    그런데 관중의 활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소백은 다행히도 화살이 허리띠의 쇠고리에 맞는 바람에 죽지 않았다. 그는 그 순간 기지를 발휘하여 말에서 떨어져 죽은 척함으로써 목숨을 건졌다. 그러고는 곧바로 제나라에 귀국하여 권좌를 차지하고 왕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제환공(齊桓公)이다.

    환공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군사를 풀어 규와 관중 일당을 소탕하고, 규와 관중을 수배했다. 그러자 규가 망명해 있던 노나라도 대군을 일으켜 제나라를 공격했지만 전쟁의 결과는 노나라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노나라가 제나라에 화의를 청하자 제나라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화의의 조건으로 규를 잡아 죽이도록 요청했다. 노나라는 할 수 없이 규를 죽이고, 관중까지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제나라 사신이 관중은 자기 나라 임금을 사살하려고 한 사람이므로 자기 임금께서 직접 처단할 것이라고 하면서 관중을 죽이지 못하게 했다.

    관중은 죄수를 압송하는 함거에 실려 제나라로 압송되었는데, 관중은 이것이 자기를 살려 주기 위한 포숙의 계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관중이 제나라에 도착하자 포숙이 직접 나와서 맞이하는 것이 과연 관중이 예상했던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포숙은 환공에게 정권을 잡은 현재 상태에 만족한다면 자기로 족하지만, 중원의 패자가 될 생각이 있다면 자기만으로는 부족하다며 관중을 강력 추천했다. 환공은 포숙의 추천을 받아들여 자신을 죽이려 했던 관중을 등용하여 재상으로 삼았다. 포숙은 기꺼이 관중의 아랫자리로 들어갔다. 환공은 관중을 임용한 이후 패자의 지위를 확보하였고, 제후들과 9회에 걸쳐 회맹함으로서 천하를 바꿀 수 있었다.

    관중이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국정을 맡자 변변치 못했던 제나라는 크게 바뀌게 되었다. 관중은 바다를 낀 지리적 이로움을 살려 해산물을 팔아서 나라를 부하게 하여 군비를 튼튼히 하였음은 물론, 항상 민중과 고락을 같이하였다. 그리하여 영을 내리면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민심이 잘 순응했다. 나라에서 의논한 정책은 백성들이 쉽게 행할 수 있었고, 백성이 바라는 것을 나라에서 잘 들어주었으며, 싫어하는 것은 제거하여 백성들의 불편을 덜어 주었다. 이 이야기는 《좌전(左傳) 〈장공(莊公) 8년 · 9년〉》에 나온다.

    「후에 관중은 포숙을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일찍이 곤궁할 적에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하였는데,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몫을 더 많이 가지곤 하였으나 포숙은 나를 욕심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나는 포숙을 위해 일을 꾀하다가 실패하여 더 곤궁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포숙은 나를 우매하다고 하지 않았다. 시운에 따라 이롭고 이롭지 않은 것이 있는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나는 여러 차례 벼슬길에 나갔다가 매번 임금에게 쫓겨났지만 포숙은 나를 무능하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시운을 만나지 못한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나는 여러 차례 싸웠다가 모두 패해서 달아났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나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패하였을 때 동료이던 소홀은 죽고 나는 잡히어 욕된 몸이 되었지만 포숙은 나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작은 일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공명을 천하에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은 이는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포숙은 관중을 천거한 후 자신은 늘 관중의 아랫자리에 들어가서 일을 하였다. 포숙의 자손은 대대로 제나라의 녹을 받고 봉읍을 가지기를 십여 대나 하였는데, 항상 이름 있는 대부로 세상에 알려졌다.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현명함을 칭찬하기보다 오히려 포숙의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을 더 칭찬하였다.(管仲曰, 吾始困時, 嘗與鮑叔賈, 分財利多自與, 鮑叔不以我爲貪, 知我貧也. 吾嘗爲鮑叔謀事而更窮困, 鮑叔不以我爲愚, 知時有利不利也. 吾嘗三仕三見逐於君, 鮑叔不以我爲不肖, 知我不遭時也. 吾嘗三戰三走, 鮑叔不以我爲怯, 知我有老母也, 公子糾敗, 召忽死之, 吾幽囚受辱, 鮑叔不以我爲無恥, 知我不羞小節而恥功名不顯於天下也. 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 鮑叔旣進管仲, 以身下之. 子孫世祿於齊, 有封邑者十餘世, 常爲名大夫. 天下不多管仲之賢而多鮑叔能知人也.)」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관안열전(管晏列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유래하여 사람들은 절친한 친구 사이를 가리켜 ‘관중과 포숙의 사귐’, 즉 ‘관포지교’라고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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